YONSEI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 ALUMNI ASSOCIATION

찬란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한국의 싄들러, 한국판 모세

故 현봉학 박사

1950년 흥남부두 철수 당시 현봉학 선생의 간곡한 간청에, 미군은 배에 있던 무기 대신 피난민들을 배에 태웁니다.

덕분에 목숨을 건진 피난민은 무려 10만여 명

그는 6.25 영웅이며 자랑스러운 연세인입니다.

故 현봉학선생님 학력

  • 1941. 3. 함흥고보 졸업
  • 1944. 9. 세브란스 의전(연세대 의과대학) 졸업
  • 1959. 5. 펜실베이니아 대학원 박사
  • 1991. 5. 연세대학교 명예박사
  • 2001. 5. 세종대학교 명예문학박사

故 현봉학선생님 경력

  • 1947~1949 버지니아 주립의대 임상병리학 수련의
  • 1950. 3.~6 세브란스 의과대학 임상병리 강사
  • 1960~1961 버지니아 주립의대 부교수
  • 1961~1988 뉴저지 뮐렌버그 병원 병리과장
  • 1964~1970 컬럼비아 대학 의대 조교수
  • 1966~1988 뉴저지 주립의대 부교수, 교수
  • 1970~1996 연세의대 재미동창회장 이사, 이사장
  • 1974~2007 재미 한인의학협회 회장, 상임부회장, 국제위원장, 학술위원장, 고문 등
  • 1977~1988 뉴저지 병리학회 학술위원, 위원장
  • 1984~1990 미국 병리학회지 편집위원
  • 1987~2007 중국 연변 의대 명예교수
  • 1988~2007 토마스 제퍼슨 의대 교수, 명예교수(1996.7.1.)
  • 1991~1994 재미 한인병리학회장
  • 1996~2002 아주대학교 의대 교수, 과장

故 현봉학선생님 의료 사회봉사

  • 1970~2007 미국 기독교고등교육재단 이사, 고문(1988~2007)
  • 1977~2007 미국 서재필기념재단 초대 이사장, 명예이사(1986~2007)
  • 1982~1985 하버드 옌칭 재단 이사
  • 1985~2007 미·중 한인우호협회 회장
  • 1987~1996 재미 한인대학생총회 고문
  • 1993~1996 국제고려학회 북미주회장
  • 1996~2002 재단법인 서재필기념회 객원이사
  • 1996~2007 미국 학술평가시험(SAT Ⅱ)한국어위원회 공동위원장
  • 1999~2001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보건의료협력본부 고문
  • 1999~2007 해외 한민족진흥후원회 공동대표

故 현봉학선생님을 추모하는 사람들

현봉학선생님을 추모하는 사람들
명예회장 장 상 명예회장
회 장 이성낙 가천의과대 명예총장
친족대표 피터현 언론인
현민기 가족대표
이 사 김일순 연세의대 명예교수
김한중 연세대학교 총장
김현옥 연세의대 교수
박명철 아주의대 교수
박창일 건양의대 의료원장
박형우 연세의대 교수
백낙환 인제학원 이사장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양재모 연세의대 명예교수
윤주헌 연세의대 학장
이경률 SCL 대표
이유복 연세의대 명예교수
이은택 Asia channel 대표
이 철 연세의료원 원장
이호영 전 아주대학교 총장
전굉필 연세의대 총동창회장
전세일 전임회장, 포천중문의대 대학원장
정남식 연세의대 교수
한승경 간사, 우태하한승경피부과 원장
황덕호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회장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 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메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 홀로 왔다.

1953년 가수 현인이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굳세어라 금순아’의 1절이다. 이 가사의 주인공은 그의 누이(혹은 애인) 금순이와 함경남도 흥남 부두에서 헤어진다. 당시 부두에는 중공군의 남하를 피해 남한으로 가려는 십만의 피난민들이 몰려 있었다. 기다림에 지친 피난민 중에는 바다에 빠져 죽는 사람도 있었다. 추위와 굶주림은 수많은 피난민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었다. 비록 피난민을 구하기 위해 배가 도착했지만, 주인공과 그의 누이는 피난민들이 만든 아수라장 속에서 서로 헤어지고 말았다. 아직까지 한국사회를 짓누르는 이산가족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1950년 크리스마스 전야였다.

1950년 12월 당시 북한을 점령하고 있던 미군과 한국군은 예상하지 못한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철수를 서두르고 있었다. 군인들의 철수도 바쁜 마당에 함경남도에 거주하던 민간인들에 대한 철수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십만의 함흥과 흥남의 주민들이 다시 공산치하에서 고통을 받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이때 이들을 구하기 위해 한 명의 의사가 나섰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1944년 졸업생이자 당시 미 10군단 고문관으로 근무하던 현봉학(玄鳳學, 1922∼2007)이었다.

현봉학은 1922년 함경북도 성진 욱정에서 함흥 영생고녀 교목을 지낸 현원국(玄垣國)목사와 한국 장로교 여전도회장을 역임한 신애균(申愛均)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현봉학은 북한이 다시 공산당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면 기독교인을 포함한 주민들에 대한 박해는 불을 보듯 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고통을 충분히 예견하면서 모른 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나는 번민으로 밤을 지새웠고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다하겠다고 결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그 기록처럼 모든 일을 다 했다. 미 10군단 사령관인 알몬드 소장을 만나 민간인 철수를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사실 사령관 입장에서 보면 곤란한 문제가 많았다. 군단 병력의 철수가 우선인데 다 민간인 철수를 상부의 지시 없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흥남 부두의 시설도 많은 수의 피난민을 철수시키기에는 열악했다. 혹시 피난민 중에 북한군이 섞여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현봉학의 거듭된 설득과 포니대령, 민사부 모아국장,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의 도움으로 마침내 사령관을 움직였다. 알몬드 소장은 군함을 이용한 민간인 철수를 결정하였다. 십만의 북한동포들은 흥남을 떠나 남한으로 향했다.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때 피난민들은 선박 구석구석뿐만 아니라, 차량 밑, 장갑차 위에서 ‘모세의 기적’처럼 홍해를 건너는 심정으로 거제도로 왔다.

현봉학을 십만의 피난민을 철수시킨 흥남 철수 작전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는 훌륭한 병리학자이기도 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기독병원에서 인턴을 마친 현봉학은 1945년 해방을 맞이하자 서울로 옮겨와 새로운 근무처를 찾았다. 그 과정에서 미 감리회 선교사 애리스 윌리엄스를 만나고 그녀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을 떠난다. 1947년 9월이었다. 목적지는 윌리엄스 부인의 아들인 윌리엄스 박사가 근무하던 미 리치몬드의 버지니아 주립대학이었다. 윌리엄스 박사는 당시 임상병리학 분야에서는 미국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현봉학은 그의 지도 아래 한국에서는 생소한 임상병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1949년 귀국한 현봉학은 자신의 모교인 세브란스의과대학에 임상병리학이라는 학문을 이식하기 시작하였다. 혈액학, 혈청학, 세균학, 생화학, 혈액은행 개념이 합쳐진 새로운 학문이 한국에 정착하는 계기였다. 하지만 곧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그는 참전을 하게 되었고, 해병대사령관 고문, 미 10군단 사령관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북한동포의 흥남 철수작전을 주도하게 된다. 1953년 종전 즈음에는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펜실베니아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뮐렌버그 병원과 뉴저지 주립 의과대학 그리고 토마스제퍼슨의대에서 근무하였다.

병원과 대학에 근무하는 동안 그는 한국인을 포함한 수많은 제자를 육성하였다. 뮐렌버 그 병원에서는 그의 업적을 평가하여 그가 정년퇴임을 한 1988년 새롭게 전산화된 임상병리학 연구실을 ‘현봉학 병리교실’이라고 명명하였다. 그 후, 귀국하여 아주대학교(1996∼2002)에서도 임상병리학 과장으로 후학을 양성하였다. 서재필 기념재단 초대 이사장을 비롯해서 안창호, 안중근, 장기려 등을 기리는 사업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보건의료협력본부 고문을 맡았으며, 1985년에는 수년간의 노력으로 연변에 있는 윤동주의 묘를 찾아 단장하고 ‘윤동주 문학상’을 제정하였다. 저서로는 수많은 의학서적 외에 ‘중공의 한인들’(1984),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과 흥남대탈출’(1999) 등이 있다.

현봉학은 자신의 공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한국의 쉰들러’라 부르는 사람들에게 “내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며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혹시 실수를 한 것은 아닌지 반성을 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시 십만 명의 고향 피난민을 흥남에서 철수할 수 있도록 도왔지만 나는 적어도 백여만 명의 이산가족을 만든 장본인이나 다름없다.” 혹시 원하지 않는 이산가족을 만들어 그들의 삶을 망가트린 것은 아닌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그는 다짐을 하였다. 앞으로 “이산가족재상봉과 재결합은 나의 생애를 두고 노력하고 이루어야 할 일이다.” 그가 1985년 설립된 미중 한인우호협회나 1991년 창설된 국제고려학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이유도 위의 결심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통일을 보지 못한 채 2007년 11월 25일 자신의 반생을 보냈던 미국 뮐렌버그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 알몬드 소장
  • 김백일 장군
  • 시인 윤동주
  • 단장한 윤동주 묘

홍남철수작전의 역사적 배경과 개요

흥남철수작전은 세계전사상 가장 대규모의 성공한 해상철수작전이다.

이작전은 1950년 6ㆍ25전쟁 당시 동북부 전선(함경남북도 일원)에서 작전 중이던 아군주력 부대가 흥남항을 통하여 대규모의 해상 철수를 단행한 군사작전이다. 1950년 10월 1일 동해안에서 38선을 돌파한 국군 제1군단은 북한 공산군에 대한 추격을 계속하여 한·만 국경선까지 북진하였다. 국군보다 한 걸음 뒤늦게 원산에 상륙한 미 제10군단도 그 예하의 해병 제1사단으로 하여금 장진호 쪽을 공격하게 하고 제3사단을 예비대로 확보하는 한편, 이원(伊院)에 따로 상륙한 제7사단을 혜산진 쪽으로 투입하였다.

그러나 11월 말 불법 개입한 중공군이 전면 공세를 감행하고 나오자 국군과 유엔군의 각 부대들은 험준한 산간계곡에서 포위망을 가까스로 벗어나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국군 제3사단이 12월 10일 성진을 출항하여 부산으로 떠난 다음, 이 지역에 남은 미군 3개 사단과 국군 수도사단은 흥남에 집결하여 미 제10군단의 지휘 아래 철수를 하게 되었다. 12월 15일 미 해병 제1사단의 출항을 시작으로 하여 17일 국군 수도사단, 21일 미 제7사단이 차례로 흥남항을 벗어나고, 마지막 방어선을 지키던 미 제3사단이 12월 24일 마지막으로 흥남을 떠나자 철수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세계전사상 가장 큰 규모로 민간인과 군인을 구출한 이 해상 철수작전에서 국군과 유엔군 10만 5,000명의 병력과 1만 7,000대의 차량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비와 물자를 옮겼을 뿐 아니라, 9만 1,000명에 이르는 북한 피난민들도 구출하였다.

흥남철수작전은 이차세계 대전당시 프랑스 북부에서 나찌 독일군에 포위되었던 35만명의 연합군이 모든 군수장비와 물자를 포기하고 1940년 5월 프랑스 덩케르크항구를 통해 성공적으로 영국으로 철수한 덩케르크 해상철수작전에 버금가는 성공한 해상철수작전으로 세계전쟁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홍남철수작전 이동 경로

홍남철수작전 기념사업회의 탄생

1995년 워싱턴 디시에서 한국전 기념공원 제막식 행사에서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은 흥남철수의 주역인 현봉학박사를 처음으로 만나 뵙게 된 감격스런 자리에서 흥남철수를 기념하는 기념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그 후 현봉학 박사는 미국에서 은퇴 후 한국의 아주대학교에서 봉사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2002년 그가 아주대학교을 떠나는 날 기념식에서 백성학 회장은 흥남철수 기념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꺼냈고 후배들에게 흥남철수 작전을 잊지 말고 기념하자고 건의하였다.

현 흥남철수작전 기념사업회 황덕호 회장이(당시 숭의대학 학장) 이 사실을 함경남도 도민회에 알림으로써 일은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백회장과 황학장, 2002년 함경남도 도민회는 조선호텔에 모여 ‘흥남철수 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켰다.

그 회의에서 회원들은 흥남철수 당시 그들이 남쪽으로 와 뜨거운 동포애로 환영받은 거제도에 기념공원을 설립하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백성학 회장이 선뜻 기금으로 1억을 희사했고 약 2천 여 명의 함경남도 도민이 힘을 합쳐 기금은 2억으로 불어났다. 2003년에는 기념공원 기본계획안이 작성되었으며 2005년 흥남철수작전 기념탑과 함께 기념공원이 거제시 포로수용소 옆에 개장되었다.

백성학 회장이 1995년 워싱턴 디시에서 한국전 기념공원 제막식 때 현봉학 박사를 처음 만나 이야기하고 이어서, 함경남도 도민회와 많은 관련기관의 호응을 얻어 완성된 이 기념공원은 평화를 사랑하는 한국인의 상징물로 길이 남을 것이다.

  • 홍남철수작전
  • 한국전 기념공원 제막식
  • 백성학 회장
  • 거제도 홍남철수기념공원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