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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6.10 만세 운동 활동으로 형무소 복역
1927년 배제고등보통학교 졸업
1931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
1932년 해주구세병원의사, 크리스마스 씰 7인 발행위원
1935 ~ 1937년 경성제국대학교 대학원 생물학과 이학석사, 법학석사
1949 ~ 1954년 세브란스병원장
1952년 기독의사회 조직
1953년 결핵협회 초대 사무총장, 크리스마스 씰 발행
1954 ~ 1956년 미국 감리교 병원 유학
1959년 원주기독병원(현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초대 원장
1992년 최고령 국회의원 당선
2002년 3월 작고,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문창모 (文昌模, 1907-2002)
결핵퇴치운동의 선구자, 원주기독병원 초대원장
문창모는 1907년 평안북도 선천군 남면 삼성동에서 3남 3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고향의 삼봉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정주 오산중학교에 입학했다가, 1921년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에 다시 입학해 재학 중 학생기독청년회 회장으로 활약했다.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던 김진호 교목의 권유로 무악재 너머 홍제동의 기와집 마루(현 홍제감리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도 3년간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배재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재학중이던 1926년 6월 10일 6.10 만세 운동이 서울에서 전개되자 참여했다. 그는 서울 서대문에 있는 피어선성경학교 기숙사에서 서울 시내 고등보통학교(高等普通學校) 대표자들과 회합을 가진 뒤 제2의 6.10 만세 운동 계획을 협의했다. 격문과 선전문을 작성, 인쇄하는 책임을 맡았으나 밀고로 사전 발각돼 도피 생활을 하게 된다. 배재고보 김성호 선생의 반강제적 권유로 자수를 한 그는 3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 독방에 갇혀 이질로 죽을 고비를 넘기다가 석방됐다. 무기정학을 받아 고향에 내려갔던 그는 몇몇 교사의 노력으로 다시 복학, 1927년 배재고보를 졸업했다.(그림 1)
이후 세브란스의전에 입학해 1931년에 졸업했다. 졸업 후 경성제국대학 의과대학 이비인후과 부수(조교)를 거쳐 1932년 해주 구세병원 의사가 됐는데, 그때 병원장이던 의료선교사 셔우드 홀(Sherwood Hall) 박사와 인연을 맺게 된다. 홀 박사는 1932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씰’을 선보였는데, 문창모 박사는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할 때 7인 발행위원 중 한 명이었다. 이후 1934년 평양 연합기독병원 의사, 황해도 옹진군 용호도 공의, 신의주 강해룡병원 의사를 거쳐 1937년 해주에서 장인의 도움으로 첫 개인병원 ‘안이비인후과 전문 평화의원’을 열었다. 1940년 홀 박사가 일본 헌병대에 의해 강제 추방되면서 홀 박사의 뒤를 이어 해주구세병원 의사로 부임했으나 6개월 후 일제에 의해 병원문을 닫았다. 이후 다시 개인병원을 차리고 해방 때까지 해주에서 진료했다.
해방 후 해주 건국준비위원회장 겸 해주시장으로 일하던 중, 공산주의자들을 피해 서울로 내려왔다. 이후 1946년 경기도립 인천병원 원장과 1947년 마산 국립결핵요양소 소장을 거쳐 1949년 세브란스병원 원장이 됐다. 1949년 결핵 퇴치를 위한 크리스마스 씰 재발행 사업을 추진, 한국복십자회에서 발행했으나 시기가 늦고 관심이 적었다. 1952년 수복 후 기독의사회를 조직하고 씰을 발행했고, 1953년 결핵협회를 조직하고 초대 사무총장으로 씰을 발행한 것이 본격적인 크리스마스 씰 운동의 기초가 됐다.(그림 2)
이후 1954년 세브란스병원장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인디애나폴리스 감리교병원 레지던트 과정을 수료한 후 1956년 귀국했다. 당시 미 감리교 선교회와 캐나다 선교부가 40만 달러라는 거금을 지원해 원주에 대형병원을 짓기로 하면서, 1959년 원주기독병원(2013년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으로 개명) 초대원장으로 봉직했다. 1964년 원주 학성동에 문이비인후과를 개업하고, 1966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원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1년 3월 의사 가운을 벗기까지 43년간 진료 활동을 펼쳤다.(그림 3)
의술을 펼치며 정치 활동도 함께 했는데, 1958년 제4대 총선과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으나 낙선했다. 이후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국민당 전국구 1번 후보로 당선돼 당시 84세 최고령 국회의원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그림 4) 국회의원 활동 당시 새벽에 원주의 개인 의원에서 진료하고 서울로 올라가 의정 활동을 했으며, 다시 원주로 내려가 진료를 하는 등 서울과 원주를 오가며 진료와 의정 활동을 병행했다. 국회의원 임기 만료 후에는 다시 원주의 개인 의원에서 94세인 2001년까지 의료 활동을 이어가다 건강상의 문제로 의료 활동을 그만둔 뒤 이듬해인 2002년 3월 13일 작고했다.
그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총회사무국 위원장(1945)ㆍ유지재단 이사(1952) 등을 역임했고, 원주YMCA 초대 회장(1972), 대한의학협회 총회회장(1976), 인천기독병원 이사장(1979), 여주 여광육아원 이사장(1996), 원주 학림원 이사장(1996) 등을 역임했다. 또한 그는 《천리마 꼬리에 붙은 쉬파리》와 《내 잔이 넘치나이다》 등의 저서를 남겼고, 한국기독병원연합회 제1회 누가상(1984년), 연세대학교 100주년 기념 명예법학박사(1985년), 국민훈장 모란장(1985년), 강원도 문화상(1987년), 원주시 문화상(1989년), 대통령 표창(1989년), 로스앤젤리스 크리스천대학 명예정치학박사(1992년), 대한민국 독립유공 건국포장(1995년), 세계평화복지인물대상(1998년), 대한적십자사 광무장(1998년), 가나안농군학교 일가상(2000년), 인간상록수상(2000년) 등을 수상했다. 작고 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2002년)이 추서됐다. 2018년에는 원주에 ‘문창모 거리’가 지정돼 그의 뜻을 기리고 있다.(그림 5)
[관련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b9qKPOfMeIc (연합아카이브-연합뉴스)
문창모, 『천리마 꼬리에 붙은 쉬파리』, 서울:삶과꿈 (1996)
문창모, 『내 잔이 넘치나이다』, 춘천:강원일보사출판국 (1999)
신규환, 박윤재, 『제중원 세브란스 이야기』, 서울:역사공간 (201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감리교인물사전
https://blog.naver.com/moonhw1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