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NSEI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 ALUMNI ASSOCIATION

찬란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배동석(裵東奭, 1891-1924)
삼일독립운동에 몸 바친 애국지사

본문

인물연혁
1891년 3월 21일 경남 김해에서 출생
1906년 대구 계성중학교 입학
1908년 항일운동으로 대구 계성중학교 퇴학 후 경신학교 입학
1910년 경신학교 졸업. 목포 유일학교 영어교사 부임
1917년 세브란스 의전 입학 
1919년 3월 삼일운동 참여 
1919년 4월 김해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김해에서 검거됨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언도 받음
1920년 에비슨의 요청으로 병보석을 얻어 세브란스 병원 구내의 결핵병동에 입원
1924년 8월 29일 작고
2008년 연세의대 명예졸업장 수여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인물정보

배동석(裵東奭, 1891-1924)

삼일독립운동에 몸 바친 애국지사

 

배동석은 1891321일 경남 김해에서 지역 유지인 한약사 배성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배성두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김해 협성학교과 김해교회의 창립자였다. 1906년 배동석은 미 북장로교 선교사 아담스 선교사가 대구에 설립한 계성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일찍부터 항일 의식이 강해 대구 계성중학교 재학 당시 배일 혐의로 체포돼 3개월의 옥고를 치른 바 있다. 그는 대구경찰서에서 옥고를 치른 후 1908년 퇴학을 조건으로 가석방된다. 퇴학 후 아담스 선교사의 추천으로 언더우드가 설립한 경신학교에 입학한다. 1910년 경신학교를 졸업한 배동석은 목포 유일학교에 영어교사로 부임하고, 그해 겨울 결혼했다. 원래 그는 부친이 고향에 설립한 협성학교에서 일할 계획이었으나, 유일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와달라는 간청이 있어 목포로 갔던 것이었다. 그러나 목포에서의 교사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인 교사의 부당한 한국 학생 체벌에 항의하다가 결국 사직하고 말았다. 사직 후에는 대한광복회의 요청으로 독립운동자금 전달하기 위해 만주와 상하이를 다녀오기도 했다.(그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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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1. 배동석 



배동석은 1916년 세브란스 의전 예비과를 거쳐 1917년 정식 입학했는데, 입학 당시 나이가 이미 28세로 만학으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세브란스의 약제과 직원으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이갑성과 경신학교 동문이기도 했다. 세브란스 입학 후 배동석은 경상도 출신의 학생 모임인 교남학생친목회 회장을 맡았다. 1919212일 이갑성은 세브란스병원 음악회를 열고, 음악회가 마치자 세브란스 의전의 이용설과 배동석, 경성의전의 김형기와 한위건, 전수학교의 윤자영 등 서울시내 전문학교의 대표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독립운동의 진행사항과 향후 계획을 점검했다.

 

3.1운동 당일, 배동석은 탑골공원에서 만세를 부르며 군중들과 함께 종로경찰서 앞까지 행진했다. 그는 35일에 열린 만세 시위에도 참석해 세브란스병원에서 가까운 남대문 정거장 앞에서 군중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서울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만세 시위에 참여한 것에 그치지 않고, 지방의 만세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배동석이 김해 출신이고 마산에는 고향 친구가 있었다. 처가도 함안이었기 때문에 경남 지역의 인사들과 연락해 경남 지역 만세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삼일운동이 일어나기 전 마산에 갔던 배동석은 마산의 지인들을 만나 독립운동 계획을 전하고, 기독교 조직을 통한 시위 운동 참여를 권유했다.

 

함안에서는 칠북 연개장터에서 39일 첫 만세 시위가 있었는데, 이는 배동석의 장인인 이령리교회 장로 김세민을 중심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서울에서 만세 운동에 참여한 배동석은 이후 고향인 김해로 내려가 만세 운동을 준비했다. 330일 밤 10시 일부 인사들이 김해읍 중앙 거리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몇 명의 주동 인물이 검거됐으나 검거를 피한 인사들은 다시 42일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만세 시위를 준비했다. 당일 오후 4시 김해읍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일제는 군과 경찰뿐 아니라 불량배까지 총동원해 시위를 진압했다. 배동석은 이때 검거돼 서울로 압송된다.

 

배동석은 출판법 위반과 보안법 위반으로 1919830일 공판에 넘겨져 19191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언도 받았다. 성격이 곧고 항일의식이 투철했던 배동석은 독립운동에 오래 관여해왔으나 심문 과정에서 일체 관련 사항을 발설하지 않아 심한 고문을 당했다. 배동석이 가혹한 고문과 옥고로 결핵에 걸리자 에비슨 원장은 일제 식민당국을 설득해 병보석을 얻어냈다. 그리고 1920년 그를 위해 세브란스병원 구내에 결핵병사를 세워 배동석을 치료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병동이다.(그림 2) 남편이 병보석으로 풀려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있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한 배동석의 부인은 심한 고문으로 처참하게 망가진 남편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실신했으며, 정신적인 충격으로 이후에도 힘든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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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배동석이 입원한 조선 최초의 결핵병사



배동석은 치료를 받았으나 심한 고문 후유증과 결핵으로 1924829일 결국 세상을 떠난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했다. 연세대학교에서는 2008년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고인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안장됐다. (그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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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3.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배동석지사의 묘

(출처 : 한국성결신문(http://www.kehcnews.co.kr) )



 

[관련영상]

네이버 TV 다큐세상: 독립운동가 배동석 지사의 생가터

https://tv.naver.com/v/5549311

 

MBC경남 뉴스데스크: 김해만세운동과 배동석 애국지사

https://youtu.be/VBko1iUfy0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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