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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연희전문 수물과 입학
1921 ~ 1925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재학, 졸업 후 생리학 교실 입국
1929 ~ 1932년 노스웨스턴 대학 유학, 이학박사학위 취득 후 귀국
1935년 교토부립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 취득
1945 ~ 1948년 미군정청 의학교육 담당관
1952년 세브란스 의과대학 학장 취임
1957년 연세합동의 주역으로 활동함
1960년 대한민국 학술원 종신회원
1982년 4월 24일 작고
김 명 선(金鳴善, 1897-1982)
영원한 연세의 스승
김명선은 1897년 11월 12일 황해도 해주에서 조금 떨어진 장연군 후암면 남호리에서 태어났다. 김명선이 태어난 장연군은 우리나라의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지역이다. 특히 김명선이 6세 때 이사한 솔내 마을은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가 세워진 역사적인 장소다. 이 마을 사람들은 거의 기독교 신자였으므로 여기서 자라난 김명선이 교인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명선은 처음에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간 지 1년이 지난 1921년 김명선은 원래의 계획대로 세브란스에 입학했다. 한편 졸업을 앞두고 진로 문제로 고민하던 김명선은 임상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기초의학자가 되기로 결심해 학교에 남았다. 수물과에서 공부한 기초과학은 생리학교실에서 근무하는 데 도움이 됐다. 그러던 중 그에게 해외 유학의 기회가 찾아와 시카고에 있는 노스웨스턴 대학으로 갔는데 거기서 소화기 생리학의 대가인 아이비 교수의 지도하에 연구 생활을 시작했다. 영어도 서툴고 연구 경험도 별로 없어 학교생활은 어려움이 많았으나 타고난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지도교수와 주위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고, 그 결과 3년 반 만에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고 1932년 9월에 귀국했다.
김명선은 우리나라의 생리학자 제1세대로 한국의 생리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그림 1) 학문적인 면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도 큰 공적을 남겼다.(그림 2) 학생들의 신상을 소상히 파악하고 제자들이 당면한 어려운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나서 해결해줬다. 학비를 내지 못해 애태우는 제자를 위해 자신의 월급을 대신 내주는 일은 다반사였고, 옷이 없는 제자에게는 옷을 사 입히고 제자들의 해외 유학을 적극적으로 알선해줬다. 또 유학비가 모자라 걱정하는 제자들에게는 비용을 보태주기도 했다. 제자들이 무서워하는 스승이었지만 존경받는 스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제자에 대한 이러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림1. 사무실의 김명선(1936년 앨범)
해방 후의 상황은 김명선을 학교 일에만 몰두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미군정이 시행되면서 세브란스의 선배이자 외과교수였던 보건후생부장이 된 이용설의 부탁으로 김명선은 경기도 후생국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또 그는 군정청 문교부장인 유억겸의 부탁으로 고등교육국 의학교육담당관도 맡았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인 교수들이 많이 재직하던 세브란스의과대학과는 달리 일본이 세운 관립학교 교수들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다. 해방 후 이들이 일본으로 철수하자 관립학교 의학교육에 큰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김명선의 주요 역할은 이렇게 공백이 생긴 학교들에 교수진을 확보해주고 학교 운영이 정상화되도록 돕는 일이었다. 김명선은 이러한 일도 잘 수행했으며 또 해방 후 발간된 최초의 의학잡지인 ‘조선의사시보’를 창간해 학술활동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학교를 재건하는 일이 막 본궤도에 오를 무렵 이번에는 한국전쟁이 터졌다.(그림 3) 학교 건물은 포화와 폭격으로 거의 파괴됐고 교수와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거제도와 청도 등에 생긴 세브란스병원 분원에서는 전쟁으로 지친 동포들의 몸과 마음을 치료했다. 김명선은 피난지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의 부학장으로 일함과 동시에 거제도 병원에서도 일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김명선은 서울로 복귀를 서두르며 파괴된 세브란스를 복원할 수 있는 지원을 미군으로부터 끌어내었다. 그리고 아직 전쟁의 포성이 완전히 멎지 않은 1952년 10월, 김명선은 세브란스의과대학의 제6대 학장으로 취임했다.(그림 4)
그림3. 부학장 재임시의 김명선(1950년 앨범)
그림4. 김명선학장 취임식(1952.12.20)
학장으로 취임한 김명선의 앞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어려운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으로 거의 파괴된 학교의 건물과 시설을 복구하고 다시 학교의 운영을 정상으로 되찾는 일이었다. 김명선은 인맥을 총동원해 각처로 다니며 지원을 얻어내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학교는 서서히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세브란스와 연희의 합동 문제가 다시 대두됐다. 세브란스와 연희의 합동 문제는 이미 일제강점기에 에비슨이 양교의 교장을 겸임하던 시기부터 제기되던 문제였고, 해방 후에도 제기됐으나 전쟁으로 더 이상의 진전이 없는 상태였다. 이 사안은 미군이 미8군 기념병원을 신촌의 캠퍼스 내에 세우기로 함으로써 급진전했다. 이는 양교의 통합을 전제로 한 것으로 미8군 기념병원과 함께 세브란스병원과 의과대학도 신촌캠퍼스로 이전하기로 했다. 그리고 선교부와 차이나 메디칼 보드 등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아 드디어 신촌에 병원과 의과대학을 포괄하는 의료원이 들어설 수 있었다.
김명선은 당시 학장으로 이 과정을 총괄하며 양교의 합동에도 앞장섰다. 물론 연희와의 합동에 반대하는 동창들과 교수들도 적지 않았지만, 세브란스의 장래를 바라볼 때 단과대학으로 남아있는 것보다는 종합대학에 속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 김명선의 신념이었다. 더구나 연희 또한 기독교 학교로 이념을 같이 할 뿐 아니라 일찍이 에비슨 교장이 양교의 교장을 겸임할 정도로 밀접한 관계에 있기도 했다. 따라서 김명선은 이 합동 과정을 성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신념을 갖고 추진했다. 연희와 세브란스를 모두 다닌 경험이 있는 김명선이 합동 과정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더욱 의미 깊었다. 결국 1957년 1월 5일 자로 세브란스와 연희는 합동하고 교명을 연세대학교로 정했다.(그림 5)
그림5. 연세합동 당시의 김명선
김명선은 군사혁명으로 교원의 정년이 60세로 단축되자 64세의 나이로 학교를 은퇴했다. 은퇴 후에도 문교부 장관의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나중에는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의 요청으로 유한재단의 이사장을 맡는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했다. 김명선은 정년 퇴임 후에도 어김없이 학교에 나와 학교와 병원 이곳저곳을 돌아봤고, 유한재단, 명휘원, 성서공회 등의 일을 하는 한편 동창들과 학교를 방문해 여러 도움을 주기도 했다.(그림 6) 이렇게 왕성한 노년을 보내던 김명선도 세월 앞에는 어쩔 수 없어 84세를 일기로 1982년 4월 24일 영면했다. 후배들을 위한 의학교육의 자료로 자기 몸을 기증하며 사후에도 모교와 후배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그는 진정한 세브란스 인의 사표(師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