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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평안남도 순안 의명학교 교사로 근무
1916년 세브란스 연합의학교를 제6회로 졸업
1918년 중국 상하이 홍십자병원에서 근무
1919년 임시정부 산하 대한적십자회 및 부설 간호원양성소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함.
1920년 안창호를 도와 흥사단 입단, 임시정부 임시공채관리국의 공채모집위원으로 활동, 1차 도미
1925년 한국인 최초로 보건학박사학위 취득(존스홉킨스 보건대학원)
1925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위생학교실 창설, 조교수로 부임, 조선 위생연구소 설립
1927년 중국 상하이 위생교육협회 근무 시작
1930년 2차 도미
1932년 안창호 석방 구명 활동, 맨해튼 보이스카우트 보건과장, 중국 항저우 결핵병원 건립 모금 전개
1934년 뉴욕에서 작고
2001년 독립운동의 공적으로 건국포장 추서
김창세
민족을 위해 공중위생학을 연구한 독립운동가
김창세(金昌世)는 1893년 2월 22일 평안남도 용강군 서화면 죽본동(平安南道 龍岡郡 瑞和面 竹本洞)에서 김승원(金承元)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김승원은 한국 최초의 안식교인 중 한 사람이었고, 김창세 역시 아버지를 따라 안식교인이 됐다. 김창세는 평양 서문내 장로교 소학교, 동경 간다(神田)구 세이소쿠(正則) 속성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해 평안남도 순안의 의명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이때 순안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던 라일리 러셀을 알게 돼 그의 주선으로 1910년 10월 1일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 입학했다. 졸업은 다소 늦어져 1916년 3월 29일 제6회로 졸업했다.(그림 1)
김창세는 졸업 후 1918년까지 러셀이 원장으로 있는 순안병원에서 근무했다. 러셀 원장은 1918년 김창세가 중국 상하이로 가서 안식교에서 경영하는 홍십자의원(紅十字醫院)에서 연수받으며 근무할 수 있게 주선했다. 그는 특히 외과수술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고 한다. 삼일운동 이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임시정부 산하 대한적십자회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또 적십자회병원에서 진료 활동에 종사하는 동시에 부설 간호원양성소 창립을 주도했고, 간호사 양성 교육도 직접 담당했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김창세는 1920년 11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으로 가기 이전인 1920년 3월 11일에는 흥사단에 입단해(그림 2) 손윗동서인 안창호를 도왔고(그림 3) 같은 해 4월 대한적십자회 간호원양성소 1기생들이 졸업하자 5월부터는 임시정부 임시공채관리국의 공채모집위원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4월 대한적십자회 간호원양성소 1기생들이 졸업하자 5월부터는 임시정부 임시공채관리국의 공채모집위원으로 활동했다.
김창세는 재림교 총회 극동분과가 미국 내 훈련과 수업료를 지원해 미국으로 떠났다. 처음에는 재림교에서 운영하는 로마린다 의과대학에서 연수하고자 했으나 교육경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1922년 제퍼슨 의과대학에 인턴으로 지원했는데 여기서 공중보건 분야의 귄위자인 하이저 박사를 만났다. 이를 계기로 공중보건학에 관심을 두게 됐다. 특히 개개인의 건강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필수라고 생각했고, 그 방법으로 공중보건학을 연구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김창세는 하이저 박사의 도움으로 당시 공중보건 분야의 최고 교육기관인 존스 홉킨스 보건대학원(Johns Hopkins School of Hygiene and Public Health)에 1923년 입학했고, 1925년 1월 ‘Some chemical and biological studies of the Mung bean, Phassolus Aureus Roxburgh’라는 논문으로 한국인 최초의 보건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그림 4)
그림4. 김창세의 박사 논문 표지
졸업 후 김창세는 유럽 13개국을 방문해 각국의 위생 상태를 시찰하는 한편 독일 베를린대학 세균학교실에서 직접 수개월간 연구에 종사했다. 1925년 10월 귀국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세균학 및 위생학 조교수로 임명됐다.(그림 5) 교육활동과 함께 학교 내에 있던 세균학실험실, 임상병리학연구소도 담당하며 한국 공중보건학 연구를 발전시켜 나갔다. 실천적 학문인 공중보건학은 정책에 반영됨으로써 그 의미를 가질 수 있으나, 식민지배하의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총독부의 정책에 반영시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독자적인 위생연구소 설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이마저도 지원을 얻는 데 실패한 김창세는 현실에 좌절해 1927년 8월, 2년 동안 근무하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교수직을 내려놓고 학교를 떠났다. 사직 후에는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위생교육협회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그는 국민당 후원하에 중국 하문(厦門) 공중위생회의 촉탁으로 그 도시의 위생개선을 위한 의연금 모집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1927년 국공합작이 결렬된 이후 중국의 정치정세는 더욱 불안정해졌고, 김창세의 활동 기반이던 위생교육협회의 활동마저 불가능해졌다. 개업의로 활동하던 그는 1930년 1월 상하이를 떠나 미국 뉴욕으로 향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어난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상하이에 있던 안창호가 체포됐다. 이를 알게 된 김창세는 안창호의 석방을 위해 대한인국민회와 서재필 등과 힘을 합해 상원의원을 만나고 기독교연방회의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백방의 노력을 다했다.
김창세는 뉴욕 시장 지미 워커의 주선으로 뉴욕의 차이나타운에 진료소를 열기도 했으며, 맨해튼 보이스카우트 보건과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모금 활동을 통해 중국 항저우에 결핵병원을 건립하려 했지만, 대공황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처럼 미국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펼치던 김창세는 1934년 3월 14일 뉴욕에서 4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뛰어난 능력과 큰 포부를 가졌으나 식민지 지식인의 한계로 인해 조국에서 뜻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이국땅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김창세는 독립운동을 한 공적을 인정받아 2001년 건국포장에 추서됐다.
[관련 영상]
김창세 관련 기사 – 도산 안창호 도와 독립운동가 삶에 충실
http://m.koreatimes.com/article/20210317/1354555
신규환, 「식민지 지식인의 초상: 김창세와 상하이 코스모폴리탄의 길, 문화와 역사 23, 2012.
이종근, 「한국 공중보건학의 선구자 김창세의 삶과 죽음」,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2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