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NSEI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 ALUMNI ASSOCIATION

찬란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박서양(朴瑞陽, 1885-1940)
신분을 넘어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가 된 독립운동가

본문

인물연혁
1885년 9월 30일 아버지 박성춘(백정)과 어머니 조씨 사이에서 출생
1897년 백정의 면천으로 호적에 이름을 올림
1900년 제중원의학교에서 의학공부를 시작함
1908년 세브란스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함 
1913년 세브란스 연합의학교 외과학 교실의 조교수가 됨
1917년 북간도 이주. 구세병원 설립. 숭신학교 설립 교육사업 병행
1921 ~ 1925년 대한군민회, 한족노동간친회에서 독립운동 활동
1935년 지속적인 독립운동 활동으로 숭신학교가 폐교됨
1936년 귀국하여 황해도 연안에서 개원함
1940년 작고
2008년 건국포장 수여
인물정보

박서양(朴瑞陽, 1885-1940)

 

박서양은 1885930일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박성춘이 백정이었던 관계로 1897년에야 호적에 올랐다. 1896년 백정들에게 면천이 허용되면서 비로소 호적을 가질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박서양이 세브란스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 박성춘과 에비슨의 인연이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18939월 조선에 갓 도착한 에비슨은 무어 목사로부터 장티푸스로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박성춘을 치료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에비슨은 몇 차례나 박성춘의 집을 방문해 정성스레 치료했고, 그 덕분에 박성춘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박성춘은 기독교인이 됐고, 백정으로는 처음으로 교회 장로까지 됐다. 박성춘은 아들 박서양의 결혼식에 에비슨을 초대했고, 결혼식에 온 에비슨에게 박서양의 교육을 부탁했다. 이에 에비슨은 박서양을 제중원에 데려와 처음에는 청소와 침상 정리와 같은 허드렛일을 시켰다. 이러한 일을 묵묵히 성실하게 해내는 박서양을 보고 의학교 입학을 허락해 1900년경부터 제중원의학교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사실 백정의 아들이었던 박서양은 체계적인 초중등 교육을 받지 못했다. 무어 목사가 세운 곤당골 예수교 학당에 잠시 다닌 것이 교육의 전부였다. 그런데도 어려운 의학 공부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의 노력과 재능이 더해진 결과로 생각된다.(그림 1) 에비슨의 엄격한 지도하에 의학교 과정을 마친 박서양은(그림 2) 19086월 세브란스의학교의 제1회 졸업생으로 졸업했고, 동시에 한국인 최초의 면허 의사가 됐다.(그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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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1) 박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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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2) 세브란스 재학 중 수술보조를 하는 박서양 (탕건을 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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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3) 세브란스 제1회 졸업생 (중간열 오른쪽) 



졸업 후 박서양은 학교에 남아 후배들을 가르쳤다. 그는 1910년 세브란스의학교의 화학 담당 강사가 돼 화학을 주로 가르쳤다.(그림 4) 이후 1913년에는 세브란스연합의학교의 조교수로 임명됐고, 외과학 교실 조교수와 부교수를 거치며 외과 환자들을 치료했다. 초창기에는 교수 인력이 부족한 상태라 박서양은 외과 이외에 해부학을 가르치는 등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그림 5) 1917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가 전문학교로 승격될 즈음 그는 갑자기 학교를 사직하고 북간도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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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4) 졸업 후 학교에 남아 화학을 가르치는 박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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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5) 1917년 교직원 사진 중의 박서양 (앞줄 오른쪽 두 번째) 



그는 북간도의 국자가(현재의 연길)에 구세병원을 개원해 동포들의 건강을 보살피는 한편 숭신학교를 설립해 교육사업도 병행했다. 박서양은 자신이 백정이라는 사회적 최하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교육을 통해 의사라는 존경받는 전문직이 됐기에 누구보다도 교육의 중요성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교육사업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176월에 열린 연길 지역 27개 학교의 연합운동회에도 참가했다. 1923821일에는 자신이 교장으로 있던 숭신학교에서 간도 지역의 한국인 학교 운영자들과 간도교육협회를 조직했다.

 

일본의 간도총영사 대리영사는 숭신학교를 불령선인이 설립한 배일성향의 학교로 주시했고, 그 결과 숭신학교는 폐교와 복교를 반복했다. 19193, 숭신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일본은 학교를 일시 폐교했다. 이처럼 일본이 숭신학교를 감시하는 가운데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이 보내는 재외동포에게라는 제목의 소책자가 1924년 숭신학교를 통해 북간도 지역 조선인들에게 배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302월에는 숭신학교 학생 50여 명이 광주학생운동과 제2차 서울만세운동에 호응해 연길 시내 중심가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했다. 손에 적기를 들고 과격한 격문을 발표하며 유인물을 배포했는데, 그 과정에서 약 20명의 학생이 체포됐다. 19326월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숭신학교는 불온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일본영사관 경찰에 의해 임시 폐교당했다가 복교됐으나 1935년 결국 완전히 폐교당했다.

 

박서양은 의료와 교육 활동 이외에 독립운동에도 직접 관여했다. 1921년 그는 대한국민회 군사령부의 유일한 군의로 임명돼 군진의료를 담당했다. 대한국민회는 삼일운동 이후 간도에서 일어난 313일 만세 운동의 결과로 조직된 조선인 자치기구 겸 독립운동 단체다. 간도 지역의 연길현, 왕청현, 화룡현 등 3개 현에 10개의 지방회와 133개의 지회를 둔 북간도 최대의 독립운동 조직이었다. 대한국민회는 산하에 군사령부라는 직할 군사 조직도 있었다. 대한국민회의 군사령부는 19205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북로독군부 등과 연합해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박서양은 바로 이 조직의 군의로 활동했다. 또한, 1925년 박서양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단체인 한족노동간친회에 참가했고, 같은 해 12월 개최된 총회에서 강연부장으로 임명됐다.

 

1936년 박서양은 북간도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갑작스러운 귀국 동기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자신이 운영하던 숭신학교가 폐교된 일과 만주사변 이후 간도지역이 일제의 직접적 지배하에 들어감에 따라 이전과 같이 독립운동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점이 귀국의 이유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박서양은 귀국 후 처음에는 황해도 연안에서 개원했다가 1940년 수색역 앞으로 이사했다. 이사한 같은 해 1215일 박서양은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박서양은 사후 68년이 지난 20088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60주년을 맞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포상받았다.



[관련 영상]

노컷V (양호) - 한국에서 최초로 외과의사가 된 박서양

https://www.youtube.com/watch?v=ssXrr93k3zU&t=11s

[KBS명작다큐] 백정 아버지와 서양의사 아들 #박서양

https://www.youtube.com/watch?v=c_fmY-z4UP4

TBS 방송: 조선 첫 근대식 병원 제중원과 백정 의사 박서양

https://www.youtube.com/watch?v=ZmUiJ8vcQxw&t=32s

참고자료
박형우·홍정완, 「박서양의 근대 문명 수용과 독립운동」, 「의사학」 15: 237-5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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