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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미국 켄터키 센트럴대학교 의과대학 (현재 루이빌의과대학) 졸업 및 의사자격 취득
1907 ~ 1911년 의료 선교사로 군산 예수병원, 광주 예수병원장, 목포 예수병원장, 정명중학교장
1913년 세브란스의학교 교수
1916년 동경대학교 의학부에서 피부비뇨기과학 연수
1917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한국 최초로 피부과를 창설하여 과장 및 주임교수
1919년 경성보육원 설립 및 고아 보육사업
1934 ~ 1942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제2대 (한국인 초대) 교장
1942년 정년퇴임 후 명예교장으로 추대됨. 안양기독보육원장에 취임
1952년 대한기독교서회 이사장 및 한국 사회사업연합회 회장
1963년 작고
1963년 정부 최고 공로상인 대한민국장 추증
오긍선 (吳兢善, 1878-1962)
-세브란스의전 초대 한국인 교장 및 한국 사회복지의 선구자-
오긍선은 1878년 충남 공주의 산골마을, 사곡면 운암리에서 해주 오씨 23대손으로 태어났다. 오긍선의 아버지 오인묵(1850-1933)은 종5품 벼슬인 봉훈랑과 선공감 감역을 지낸 조선시대 양반가의 인물로, 관직으로의 출세를 위해 어린 오긍선에게 유학을 가르치며 과거를 준비시켰다. 당시 전북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농민운동의 전란 중에 오긍선의 가족은 군산으로 피난하였다.(그림 1)
갑오개혁을 거치며 사회 분위기의 변화 속에 젊은 청년이 된 오긍선은 1896년 배재학당에 입학해 서양 학문을 익혔다. 배재학당은 기독교 선교사 아펜젤러(1858-1902)가 선교활동을 위해 세운 서구식 학교이다. 1897년 오긍선은 아펜젤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한편 서재필을 중심으로 배재학당 내 협성회가 설립됐고, 오긍선도 이 모임에서 활동했다.
대한제국 성립(1897) 이후 정부로부터 독립협회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면서 오긍선은 어려운 시국을 피해 잠시 충남 공주로 돌아가, 당시 공주에 머무르던 스테드먼 선교사의 집으로 피신했다. 만민공동회 해산 등으로 어수선했던 정국이 수습되고 서울로 돌아온 오긍선은 1900년 봄에 배재학당을 졸업했다. 이후 오긍선은 공주로 돌아와 스테드먼의 선교업무를 도왔고, 군산의 구암리소학교에서 근무했다. 당시 군산지역 의료선교를 위해 군산진료소에 부임한 알렉산더(1875-1929) 의료선교사가 본국으로 귀국을 하게 되면서, 선교사들의 추천을 받은 오긍선은 알렉산더와 함께 1903년 일본을 통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으로 건너간 오긍선은 켄터키 센트럴대학교에 진학했고, 1903년 12월부터는 루이빌캠퍼스에서 의학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그림 2) 1907년 오긍선은 켄터키 센트럴대학교 의과대학(현재 루이빌의과대학)을 졸업했고, 미국 의사자격을 취득해 1907년 미국 남장로회 의료선교사 자격으로 모국으로 귀국했다.
그림2. 오긍선 선생 미국 유학시절 (1902-1907, 앞줄 오른쪽 첫 번째)
금의환향한 오긍선은 당시 순종 황제가 제시한 정3품 황실 시의나 대한의원의 의관을 마다하고 의료선교사의 길을 택해 군산예수병원에 부임했다. 병원 일을 하던 중에도 군산지역 사람들의 개화와 문맹 퇴치를 위한 사업으로 1908년 소학교인 안락학교(각주, 안락은 알렉산더의 한국식 이름)를 개교하고 이듬해 중학교 과정인 영명학교의 교장직을 맡아 학교의 기틀을 세웠다. 1909년 목표 예수병원장으로 취임해 활동하던 중,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부터 부름을 받게 된다. 알렌(1858-1932)과 헤론(1856-1890)이 1886년에 시작한 제중원의학교의 의학교육은 초기에는 계획처럼 잘 시행되지는 못했다. 이후 에비슨이 1893년 제중원 원장으로 부임하면서 제중권 운영권이 조선 정부에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이관됐다. 이에 본격적으로 의학교육이 재개될 수 있었고, 1934년까지 에비슨에 의해 세브란스의전의 토대가 구축됐다. 이 과정에 에비슨은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에 오긍선 초빙을 요청했고,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는 남장로회 의료진을 대표해 오긍선을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 파견하기로 했다. 이후 오긍선은 1913년 세브란스의전 최초 한국인 교수로 부임됐다.
주) 1904년 세브란스의 기부에 의해 세브란스병원 신축 후 1909년 ‘세브란스의학교’로, 1913년 6개 기독교 교파의 연합 합의 이후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개명, 1917년 사립 고등교육기관 인가 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인가받음. 이하 세브란스의전) |
오긍선은 1942년 정년으로 퇴직할 때까지 31년 동안 세브란스의전을 지키고 성장시키는 중심인물이 됐다. 처음에 오긍선은 해부학 교수로 부임 됐으나, 해부학 강의 이외에도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각 과의 보충 강의를 시행했고, 전담 교수가 확보되지 않은 기초의학을 교육했다.(그림 3,4)
그림3. 해부학을 강의하는 오긍선 (1921)
그림4. 환자를 진료하는 오긍선
1915년 전문학교령이 공포되자 조선총독부의 각급 사립학교에 대한 탄압이 한층 강화되는데, 일본 문부성이 승인하는 학위를 가진 교수만 인정하고 일본어 수업을 강제하는 법안이 발효됐다. 이에 오긍선은 교직을 사임하고자 했으나, 에비슨의 극구 만류로 오긍선은 동경 유학을 결정한다. 1916년 4월 일본 동경제국대학 의학부에서 1년간 공부를 하는 중에, 피부비뇨기학의 권위자인 도히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피부비뇨기학을 연구했다. 1917년 5월 귀국 이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피부비뇨기학과장 겸 주임교수로 임명됐다. 1920년 에비슨은 오긍선을 학감으로 임명하고 학사행정 대부분을 맡겼다. 이후 8년간 학감으로 재직하면서 세브란스의전의 발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학칙 개정을 통해 의과대학의 과를 체계화하고, 수련제도 및 학생 규칙을 제정했다. 오긍선은 세브란스의전 활동기에도 보육사업 등 사회사업 분야에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림 5)
그림5. 오긍선 선생과 경성보육원 원아들 (1920)
오긍선은 1929년 9월부터 미국과 유럽의 의료 선진국을 답사했고(그림 6) 1903년 2월 스위스 빈 대학에서 피부비뇨기학을 연구한 뒤 5월에 귀국했다. 1930년 10월에는 세브란스의전 부교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1934년 4월 세브란스의전 제2대 교장 겸 한국인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그림 7) 당시 1917년부터 부교장으로 역임한 반버스커스와 병원장 더글라스 에비슨(주, 올리버 에비슨 교장의 아들) 등 노장 교수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에비슨은 오긍선을 2대 교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오긍선에 대한 인간적인 믿음과 한국인의 교육을 한국인에게 맡겨야 한다는 소신과 양심에 따른 결정이었다. 교장으로 취임한 오긍선은 의과대학의 교육 및 연구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고, 한국인 교수 양성과 한국인 주임교수 임명 등 오늘날의 연세의대 근간을 다지는 데 큰 노력을 했다. 또한 세브란스병원의 직제와 사무 규정을 제정해 사무체계를 세웠다.(1937). 1941년 9월에 65세 교수 정년제도를 처음으로 제안하고, 퇴직 준비를 했다. 당시 인재가 드문 시기에 65세 정년은 통념을 뛰어넘는 결정이었다. 이듬해 1942년 8월 이영준에게 교장직을 물려주고 오긍선은 명예 교장으로 추대됐다.
그림6. 1929년 유럽 의료선진 국가 답사 시 사용한 여권
그림7. 세브란스의전 교장 집무 모습 (1936)
퇴임 이후 사회사업에 집중하고자 했던 오긍선은 고아 보육 기관인 안양기독보육원장에 취임했다. 1946년에는 한국사회사업연합회가 발족해 이사장에 추대됐고 대한성서공회 이사로 선출됐다. 1948년에는 대한기독교서회 이사로 선임돼 기독교 출판사업에 참여했고, 사회사업연합회 이사장으로 선임됐다. 6.25로 인해 1951년 1월 부산으로 피난해 가덕도로 기독보육원 원아들을 피난시켰고, 전후 1952년 9월 보육원을 안양(주, 현재 안양 좋은집)으로 옮겨 재건했다.
오긍선은 세브란스의전 의학교육에 대한 기여와 사회사업에 대한 공로로 여러 분야에서 상을 받았다. 1955년 보사부장관으로부터 사회사업 공로표창과 대한의학협회로부터 의학교육 공로상, 1957년 경기도지사로부터 사회사업 공로 표창, 1961년 육군대학 총장으로부터 건군 교육에 대한 감사장을 수상했다. 1962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정부로부터 공익포장과 새싹회의 소파상(그림 8)을 받았다. 1963년 5월 18일, 86세를 일기로 서울 은평구 자택에서 서거해 5월 22일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장으로 영결식이 거행됐다. 서거 후 8월 15일 정부로부터 최고 공로상인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그림8. 세브란스의전 교장 집무 모습 (1936)
해관 오긍선 선생은 우리나라 개화기,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까지 미국에서 배운 현대의학을 우리나라에 정착시킨 선구자일 뿐만 아니라 권력과 부귀영화를 탐하지 않고 고아 돌봄을 통해 평생 사회사업에 헌신했다. 이러한 오긍선 선생의 뜻을 기리는 사업으로 1977년 해관 오긍선선생 기념사업회가 발족해 매년 개최되는 기념학술강연회 등을 통해 오긍선 선생의 숭고한 뜻을 후학들과 사회에 전하고 있다.
[관련 동영]
사회복지역사연구소
https://www.youtube.com/watch?v=dE5HGi9dFDE
사회복지역사연구소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피부과학교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피부과학교실 100년사」, 2017.
해관오긍선선생 기념사업회, 「한국 근대의학의 선구자 해관 오긍선」, 역사공간.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