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NSEI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 ALUMNI ASSOCIATION

찬란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김필순 (金弼淳, 1878-1919)
세브란스 1회 졸업생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대의

본문

인물연혁
1878년 6월 25일 황해도 장연군에서 출생
1895년 7월 3일 세례를 받고 정식 기독교인이 됨
1895 ~ 1899년  배재학당 재학
1899년 제중원 의사 샤록스의 통역 및 조수로 제중원과 처음 인연을 맺음
1905년 최초의 국문 의학교과서  [약물학] 발간. 이후 다수의 의학교과서를 번역하여 발간함. 
1908년 6월 세브란스 제1회 졸업생으로 졸업함. 이후 모교에서 후배 교육에 종사함.
1911년 12월 중국 통화로 망명. 적십자병원을 개원하여 동포를 치료하는 한편 독립운동 지원 
1916년 8월 치치하얼로 이주. 북제진료소를 여는 한편 이상촌 건설을 시작함.
1919년 9월 사망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 수여
인물정보

김필순 (金弼淳, 1878-1919)

세브란스 1회 졸업생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대의

  

김필순은 1878625일 황해도 장연군에서 태어났다. 이곳에 서상륜(徐相崙서경조(徐景祚) 형제가 이주해 한국 최초의 교회를 만들었다. 새로운 문물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김필순의 집안은 서씨 형제가 교회를 설립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를 계기로 김필순의 집안은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김필순 자신은 189573일에 언더우드로부터 세례를 받고, 그의 권유로 서울에 가서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당시 배재학당에는 이승만, 주시경, 남궁혁 등 나중에 한국 근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들이 학생으로 공부하고 있었다.(그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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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김필순 


 

영어 실력이 뛰어났던 김필순은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899년부터 제중원 의사 샤록스의 통역 및 조수로서 제중원과 인연을 맺었다. 에비슨은 1900년 안식년을 마치고 본격적인 의학교육에 착수했다. 에비슨은 의학교육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국문 의학 교과서가 필요함을 절감하고 의학 각 분야의 교과서를 국문으로 만드는 일에 매진했다. 이 과정에서 김필순은 주도적 역할을 했다. 국문 의학 교과서의 편찬은 다른 나라에서 나온 책들을 번역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1905년 제중원에서 발간된 최초의 의학 교과서인 [약물학]을 번역했고(그림 2), 이듬해인 1906년에 나온 세 권으로 된 [해부학]도 번역했다. 이 밖에도 [신편 화학교과서 무기질](1906), [신편 화학교과서 유기질](1909), [외과총론](1910) 등 많은 교과서를 번역했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번역된 많은 의학 교과서가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사용되지 못했지만, 한국의 서양의학 수용 과정에서 김필순이 공헌한 바는 지대하며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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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김필순이 번역한 [약물학] 교과서 표지



 

이처럼 에비슨을 도와 교과서 편찬작업을 수행하는 한편, 의학생으로 의학 공부도 병행했던 김필순은 마침내 19087인의 세브란스 제1회 졸업생의 한 사람으로 정식 의사가 됐다.(그림 3) 졸업 후에 학교에 남아 후배를 가르치는 한편 학생 때부터 해오던 교과서 번역작업도 계속했다. 김필순의 활동은 단순히 교육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에비슨은 일찍부터 김필순의 능력을 인정해 교육뿐만이 아니라 병원 운영에도 관여시켰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 장차 자신의 뒤를 이어 병원을 맡을 인재로 키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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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3. 세브란스 제1회 졸업생 사진



그러나 국권 피탈로 나라를 상실한 고난의 시대에 김필순은 의학교육자와 병원 경영자로서 평탄한 삶을 이어갈 수 없었다. 1905년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며 망국의 길에 접어들자 김필순은 국권 회복을 위한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1907년 비밀정치 결사 조직인 신민회에 가입했다. 당시 세브란스 구내에 있던 김필순의 집과 그의 가족이 운영하던 김형제상회는 신민회의 비밀회의 장소로 사용됐다. 그는 안창호와도 친밀히 지내 의형제를 맺고 국내에서 안창호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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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4. 김필순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1912)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일제는 19117월 소위 105인 사건을 일으켜 신민회의 인사를 포함해 주로 기독교 계통의 독립운동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검거될 위험에 직면한 김필순은 19111231일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원래의 계획은 당시 중국에서 일어난 신해혁명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지에서 동포들이 겪는 어려움을 보고 계획을 바꿨다. 그는 의사라는 직업적 장점을 십분 활용했다. 통화에서 적십자병원을 개원해 병으로 고생하는 동포들을 치료하는 한편, 병원에서 발생한 수입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김필순은 이상촌을 세워 동포들과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를 만들고, 독립군을 양성해 국권을 되찾으려는 꿈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가족을 중국으로 불러 모았다. (그림 5) 형 김윤오는 병원의 감독을 맡았고, 어머니도 흙벽돌을 직접 구우며 이상촌 건설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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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5. 중국에 모인 김필순의 가족


 

그러나 일본의 영향력이 통화가 위치한 간도 지방에도 점차 미치기 시작했다. 이에 김필순은 치치하얼을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으려 계획했던 안창호의 권유를 받아들여 간도를 떠나 내륙 깊숙한 몽골의 치치하얼로 이주했다. 치치하얼에서 그는 북쪽에 있는 제중원이란 의미로 북제진료소를 개원했다. 이곳에서 그는 현지인들과 동포들은 물론, 독립투쟁 중에 다친 독립군도 돌보았다. 그는 자신의 병원을 독립운동가들의 연락 거점으로 활용했다. 또한,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대규모 농장을 꾸렸으며, 농장 경영에 매진하기 위해 매제이자 세브란스 후배인 최영욱을 불러 병원 일을 맡기고 자신은 농장에 더욱 큰 노력을 쏟았다.

 

1919년 독립의 열망이 삼일운동으로 표출되고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그러나 김필순은 같은 해 9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42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아, 더 이상 독립운동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사진 6) 당시 유행하던 콜레라가 원인이었을 수도 있지만 다른 의혹도 제기됐다. 이웃에 있던 일본인 의사가 준 우유를 마시고 갑자기 건강이 악화해 숨을 거두었는데, 이 일본인 의사가 일본의 특무 요원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근대의학 발전에 중요한 공헌했을 뿐 아니라, 나라를 살리기 위한 노력에 투신한 대의의 삶을 살았던 김필순은 그렇게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1997년 김필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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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김필순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기사(獨立新聞 18. 1919107)

  


한편, 김필순의 집안에서는 한국의 근대사에 큰 역할을 한 많은 인물이 배출됐다. 유명한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는 그의 큰형 김윤방의 딸이었다. 김필순의 첫째 여동생 구례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서병호와 결혼했고, 둘째 여동생 순애 역시 독립운동가인 김규식과 결혼했다. 막내 여동생 필례는 세브란스 6회 졸업생 최영욱과 결혼했고, 한국 기독교여자청년회(YWCA)의 창설자이며 평생을 여성 교육에 헌신했다.


 

[관련영상]

한국 최초의 의사면허, 김필순 님

https://www.youtube.com/watch?v=uvdu6XiS1NI (연합아카이브-연합뉴스)

참고자료
박형우, ‘대의 김필순’, 「의사학」7: 239-53, 1998.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과 엮음, 「세브란스 독립운동사」, 역사공간, 2019. 50-53쪽, 386-3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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