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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캐나다 온타리오로 이민
1887년 토론토 의과대학 졸업하고 모교의 교수로 재직
1893년 조선에 의료선교사로 내한. 제중원 원장으로 부임함
1894년 제중원 운영권을 조선정부로부터 이관받아 제중원을 온전한 선교기관으로 재편함
1899년 뉴욕에서 세브란스 씨를 만나 새병원 건립 기금을 기부받음
1904년 남대문 밖 새로 지은 제중원, 세브란스 병원 개원
1905년 최초의 국문의학교과서 [약리학] 을 발간함. 이후 다수의 의학교과서를 발간함
1908년 7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함. 이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면허의사가 됨
1916년 언더우드의 사망으로 연희전문을 맡아 은퇴하던 1934년까지 세브란스와 연희 양교 교장을 겸임
1919년 삼일운동 당시 총독부의 폭압적 처사에 항의하고 그 내용을 해외에 알림
1934년 세브란스의전과 연희전문 교장에서 은퇴하고 이듬해 미국으로 감
1952년 대한민국정부로부터 독립장을 받음
1956년 8월 28일 미국 플로리다에서 작고
올리버 R, 에비슨 (Oliver R, Avison)
세브란스를 설립하고, 한국의 고등교육을 개척한 선교사
에비슨은 1860년 6월 30일 영국 요크셔의 재거 그린(Jagger Green)이라 부르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6세가 되던 1866년 에비슨 가족은 이민을 떠나 캐나다 온타리오의 웨스턴(현재 토론토 시의 일부)에 정착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생활을 하던 에비슨은 화학 분야의 적성을 살리기 위해 약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토론토의 온타리오 약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빅토리아대학교(졸업할 때는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에 편입하여 1887년 6월 졸업하고 모교인 토론토 의과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토론토 시장의 주치의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림1. 토론토대학교 교수 시절의 에비슨(1891년)
에비슨은 1893년 11월 제중원 원장이 되어, 빈튼의 재임 시기에 거의 상실했던 병원의 기능을 회복시켰다.(각주 1) 에비슨은 1894년 조선 정부와 협상을 해서 제중원의 운영권을 선교부로 이관받아 제중원을 온전한 선교의료기관으로 재편했다. 그는 효과적인 진료와 교육을 위해서는 큰 규모의 병원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1899년 안식년을 맞아 참석한 뉴욕의 선교대회에서 한국에 큰 규모의 병원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그의 연설에 감동받은 세브란스 씨는 병원설립 자금의 기부를 약속했고, 그 결과 1904년 남대문 밖 새로 지은 제중원, 즉 세브란스 병원이 문을 열었다.(그림 2)
각주 1) 제중원은 고종황제 주치의인 알렌과 조선정부의 지원으로 1985년에 재동에 설립된 합자병원이다. 1887년 구래개로 이전하였다. 선교사로 내원 한 알렌 (1대), 헤론(2대), 빈턴(3대)으로 이어가면서 운영을 담당하였다. |
내한 이전 의과대학 교수로 활동했던 그는 의학교육에 대한 열의가 누구보다도 컸다. 또한 그는 조선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의료 인력은 조선인의 교육을 통해 양성되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물론 초기에는 선교의사들이 일정 역할을 할 수 있겠지만 결국 이는 조선인으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바쁜 진료 활동의 와중에도 학생들을 모아 의학교육을 시작했다.
초기의 의학교육이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의학을, 그것도 생소한 서양의학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교재가 필요했다. 이전 알렌이 1886년 제중원에서 시작한 의학교육이 제대로 결실을 맺지 못한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적절한 의학교재가 없었던 것이 그 중요한 이유였다. 에비슨은 의학의 전 영역에 걸친 한국어 의학교과서 편찬을 목표로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을 망라하는 의학 교과서 출간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김필순, 홍석후, 홍종은 등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전 과목에 걸쳐 한국어로 된 의학 교과서를 편찬했다. 그 결과 1905년 약리학 교과서를 필두로 무기화학, 유기화학, 해부학, 병리학, 외과학, 산과학 등 많은 국문 의학 교과서들이 출간되었다.(그림 3)
서양의학을 토착화시키려는 에비슨의 노력은 단순히 교재편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한국의 의학은 결국 한국인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한국의 의학계를 짊어질 동량들을 길러내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리고 알렌, 헤론 시대와 달리 1908년 7명의 정규 졸업생을 배출함으로써 이들이 한국 최초의 의사 면허인 의술 개업 인허장을 취득하게 했다. 즉 의학 교육이 교육 자체로서의 의미를 넘어서 사회적 공인 과정을 밟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이들은 모교에 남아 후학을 양성함으로써 서양의학이 한국에 뿌리를 내려 자생할 수 있는 토대를 쌓았다. 이후에도 그는 자신이 교장으로 있던 세브란스의전의 졸업생들 중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여 유학을 보내고 이들이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면 모교의 교수로 임명하였다.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세브란스의전의 한국인 교수 비율은 점차 높아져 갔고, 결국 외국인 선교사들을 능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일제에 의해 운영되던 경성제대나 경성의전의 경우와는 뚜렷이 대비되는 점이었다. 그리고 에비슨은 자신의 후임으로 자신과 같은 외국인 선교사가 아니라 한국인 오긍선을 지명했다. 그의 이런 결정은 다른 선교사들의 반발을 샀지만 그는 자신들이 시작한 이 모든 사업은 결국 한국인들이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그때가 왔다고 믿고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에비슨은 단순히 의학교육에만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의학뿐 아니라 보편적 학문을 가르칠 수 있는 종합대학의 설립을 꿈꾸었다.(각주 2)
각주 2) 에비슨 박사는 조선의 문화를 개발함에 쓸 기부금을 모집하고자 캐나다와 미국의 유명한 교회는 모두 다녔다. 이 기금으로 세브란스병원과 함께 언더우드 홀, 사이언스홀 등을 건립하였다. |
그 밖에도 에비슨은 1919년의 3.1운동 때 식민 통치의 가혹함과 비관용, 민족차별 등 조선총독부가 저지르고 있는 폭정에 대해 총독부 측의 답변을 요구하는 한편, 만세운동의 상황과 폭압적인 탄압이 자행되는 식민지의 현실을 해외에 알리는 등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 하나님의 뜻을 펼치고자 선교사로서 42년 동안 활동하면서, 조선의 보건의료와 고등교육뿐 아니라 독립운동에도 관여했던 그는 1934년 세브란스 교장직에서 물러나 1935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림 5) 그는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1942~43년에 기독교인친한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의 재무를 맡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과 독립운동을 지원할 것을 호소하는 활동을 계속하다가, 1956년 8월 28일 미국 플로리다에서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림 6) 대한민국 정부는 1952년 평생을 한국을 위해 헌신한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독립장을 수여했다.
[관련영상]
CGNTV: 병든 자와 함께, 에비슨 선교사, 선교 130주년, 복음의 씨앗을 기념하며
https://www.youtube.com/watch?v=rnNDwyA3J0U
[iSeverance] 세브란스 문화유산 #1 : 에비슨 그리고 최초의 조선인 의사
https://www.youtube.com/watch?v=b4NIfQZLBSo
선교한국: 조선을 사랑한 선교사05 올리버 에비슨 Oliver R Avison
https://www.youtube.com/watch?v=QKg1zUgoR0c
선교음악: 올리버 에비슨(공한수 작시, 임긍수 작곡, 바리톤 한경석, 피아노 임정우)
올리버 R. 에비슨/ 박형우 편역, 「올리버 R. 에비슨이 지켜본 근대한국 42년 1893-1935」, 청년의사, 2010.
여인석,「에비슨의 사상」, 「연세의사학」13(2): 73-88, 2010.
동아일보 기사 1921년 3월 24일, 1921년 10월 3일